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기차역 === 나치 독일 점령지와 추축국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들은 처음에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기차역으로 모두 모여서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들로 나뉘어진다.[* 초창기에 이송된 유대인들은 일반 승객용 객차로 운송되었다. 소수의 독일군을 제외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싣고 돌아갈 화물이 없었기 때문. 하지만 수용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유대인들은 좌석도 제대로 없는 [[화물열차]]로 운송되었고, 객차는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물자들을 싣고 다시 타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이어 군의관이 약식으로 성인 남녀 중 노동 가능/불가능자를 나눈다. 실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헝가리의 소설가 케르테스 임레(Kertész Imre, 1929-2016)가 쓴 자전적 소설 <운명>을 보면, > "수감자들이 몰려들어 나이를 묻자, 우리는 각자 나이에 따라 14살, 13살 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안 된다는 손짓을 하며 저마다 "15살" 이라고 토를 달았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될 대로 돼라…' 하며 "좋아요, 그럼 난 이제 15살이에요." 하고 말했다. 의사 앞에 나갔을 때, 몇 살이냐고 묻자 "15살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말에 의사는 미소를 지었는데, 이는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모스코비치에 이르렀을 때, 그는 "15살입니다. 일할 겁니다." 하고 계속 반복했으나 큼직한 손이 그를 다른 줄로 끌어냈다. (중략) 이후 쾨베시와 동료들은 다시는 모스코비치를 보지 못했다. 가스실로 끌려간 것이다. 자전 소설 <나이트(night)>로 아우슈비츠 학살을 고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비젤]]은 이렇게 증언했다. >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가자 수감자가 다가와서 몇살이냐고 물었다. 내가 열다섯이라고 하자 '멍청아, 너는 열여덟 살이야'라고 했다. 아버지는 오십이라고 하자 '당신 나이는 사십이야'라고 했다"고 고백했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으면 입소 단계에서 곧장 '선별'돼 '굴뚝'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때 그와 아버지는 일단 살아남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은 바로 선별되어 살해당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해방까지는 살아남지 못하고 부헨발트에서 사망했다.] 사람을 나눌 때 구분 기준은 제멋대로라 수용소의 남은 자리에 따라, 가끔은 정리하는 놈의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 분류 작업을 거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수용소에 남는 자리가 없으니 모조리 가스실로 보내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분류 작업은 SS 군의관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인 분류 작업은 Sonderkommando(존더코만도. 특수 직무반이라는 뜻)라 불리는 남성 유대인 수감자들이 담당했다. 이렇게 노동 불가 집단으로 구분된 어린이, 노인, 임산부, 그리고 질병이나 장애로 노동이 불가능한 성인들은 정리 후 즉시 가스실로 직행하게 된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등록되지 않은 희생자의 수를 집계하기 힘들다. 그리고 아주 가끔 기차역에서 어린이 몇 명을 데려가 특별 대우해 주는 SS 대원이 한 명 있었는데, 다른 수용인들이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물론 이 SS 대원의 정체는 생체 실험으로 악명높던 [[요제프 멩겔레]] 박사로, 이렇게 선별된 '멩겔레의 아이들'은 상당수가 인체실험으로 사망했다. [[파일:external/wagner.wpengine.netdna-cdn.com/Auschwitz-tattoo.jpg]] 이 분류 과정이 끝나야만 비로소 등록의 과정을 거친다. 먼저 수감자들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나마 찍던 사진도 초반에만 찍었다. 여기에서 생활하면 얼굴이 변형되어 사진으로 신분 확인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은 후 개인 수감 번호를 부여하는데, 대부분의 유대인 수용소를 포함한 수용소는 수감 번호는 옷에 새겨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수감자의 왼 팔뚝에 숫자 문신을 새기게끔 했다. 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새 수감자와 아픈 자, 죽은 자의 신원을 빠르게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1942년에 시범 도입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3년에는 도입 이전 수감된 인원과 여성 수감자들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일련 번호 문신을 부여했다. 유대인의 경우 일련 번호 아래 역삼각 도형이 추가로 새겨졌다. 다만 수용자들은 이 번호를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 카포나 SS 대원들에게 번호를 불리면 곧 죽는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